4대 성인(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이상 탄생順) 중에 속하는 공자를 학술적으로 연구해서 문단에 동시에 발표하자고 했던 갑작스런 필자의 제안에 흔쾌히 동행하기로 한 공광규 시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서로가 시 창작 교육으로 분주한 시간을 보내는 입장에서 필자의 갑작스런 제안에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필자와의 문우(文友)로서의 우정은 차치하고라도 문인들에게 경제적인 보장이 여의치 않은 요즈음의 열악한 환경에서 곡부공씨 어촌공파 세걸종중 문중(門中)에서 비용의 대부분을 지원해 주는 여행이기도 했지만 평소에 공자에 대한 탐구와 경외심을 감안하면 시창작의 귀중한 바탕이 될 이번 여행에 동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공자묘가 있는 화북 지방 산동성(山東省)으로 떠나는 의미 있는 여정은 시작되었다.
공자는 흔히 사상가로 알려져 있지만 노나라의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너희는 어찌하여 시를 배우지 않는가? 시는 내면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사물이나 사람에게서 새로운 관점으로 볼 수 있고, 시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감을 집단화할 수 있으며, 마음 속 좋고 그름을 표출할 수 있고, 가까이는 기쁨으로 부모를 섬길 수 있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으며, 온갖 짐승과 초목의 이름을 알게 하는 장점이 있다"라고 말하였다. 우리가 시를 배우고 시를 가까이해야 할 이유를 명확하게 규정한 것이다. 시를 2000편 가까이 쓰면서 또 후학들에게 시를 가르치고 있는 필자에게 금과옥조 같은 명분을 제공함은 물론 공자의 시를 통하여 필자 스스로가 유교의 인의예지(仁義禮智)을 바탕으로 죽기 전까지 제한 없는 시 창작의 의지를 다시 불태운 셈이다.
공자가 탄생한 곡부(曲阜)는 공자의 사당인 공묘가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후손들의 묘인 공림(孔林)등 이곳의 역사적 가치는 매우 높으며, 중국에서는 공자를 사후에 황제의 지위로서 인정하고 있을 정도이다. 중국인들은 인(仁)을 바탕으로 하는 유학(儒學)을 신의 경지와 동일한 종교로서의 위치까지 추앙하고 있으며, 그 무한한 가치를 비록 5일이라는 짧은 일정이지만 필자는 몸소 체험한 공자의 행적을 수소문하며 시와 산문으로써 완성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를 생매장하여 죽인다’는 의미이다. 진(秦)나라의 시황제는 왕권 강화를 위해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금할 목적으로 모든 경서(經書)를 소각시키고, 학자를 포함한 많은 지식인들이 몰살을 당하는 등 가혹한 정치를 했다. 하지만 논어, 상서, 효경, 예등의 공자의 유품만큼은 온전히 보전되게 되었다. 공자의 발자취가 사라지는 안타까움에 그 후손들이 '공자의 집 벽'(魯壁이라고 칭함)에 목숨을 걸고, 은밀하게 감추어 둔 덕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인자의 지침서인 논어를 우리가 접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다.
'여위군자유, 모위소인유(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는 논어의 ‘옹야(雍也)’편에 나오는 문장이다. 군자(君子)는 ‘덕이 있고, 어진 사람’을 일컫는데, 이는 유교에서 가르치는 가장 이상적 인간형이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대인배’라는 말과는 맥은 다르지만 결을 같이 한다. 근본보다는 시류에 집착하는 제자 자하에게 "소인유가 되지 말고 군자유가 되어라”라고 가르치는 공자의 가르침이다. 소인배들이 넘쳐나는 작금의 시대에 말초적 쾌락과 권력만을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일갈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기원전 551년에 태어난 공자는 이렇게 극도의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를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