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럼>나무처럼 살아야지
  • 시인 공석

  •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소유를 갈구하며 살았는지 모른다. 인간의 손이 자꾸 쥐려고 하는 모양인 것은 그만큼 비우려는 것보다 손에 움켜쥐려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배려하려고 두 손을 위로 펴서 양보하는 것처럼 보여도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사코 손을 접으려고 하는 모습에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은 증명이 되고 있다. 남에게 선의를 베푸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내 육신이 더 많은 죄를 범했기 때문에 나는 육신이 반란을 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성프란시스』에서 성 프란치스코가 수도사들과 만찬을 즐길 때 음식에 재를 뿌리며 한 말이다. 내 몸은 수많은 죄를 지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성프란치스코는 그렇게 ‘인간의 쾌락’에 스스로 재를 뿌리고 있다.

    '나무처럼 살아야지 / 나(我) 무(無) / 비우지 않고 무엇을 채우려 하나 // 마지막 잎새 떨군 앙상한 몸 / 비로소 해탈이 가능하거늘 // 버려야지 / 양지에만 있는 심목(心目) / 언젠가는 미혹에 눈멀텐데 // 현혹시키는 뛰어난 재명(才名)에 / 세간 인심 요지부동이나 // 인명재천의 요절은 불시의 일 // 나무처럼 살아야지 / 나무(我無)처럼' 필자의 시 '나무처럼 살아야지'는 비움의 진리를 나무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시 ' 나무와 나'에서는 언제나 맨몸인 채 그대로 은근한 소박함이 눈부신 나무와 헐벗은 영혼은 방치한 채 매일 의복으로 치장하는 나를 자책하고 있으며, 아무리 모진 강풍이 몰아쳐도 부러질지언정 부화뇌동하지 않는 나무와 한시도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가벼이 떠도는 경망스러운 나를 적나라하게 비교하고 있다.

    '나무는 남의 탓을 하지않는다 / 시들어 아스러질 상황에도 / 초록의 꿈을 뒤로한 채 / 홀로 묵묵히 감수하여 / 화석처럼 응달에 침묵할 뿐이다 / 툭하면 제 잘난 듯 / 주위에 원망을 쏟아내는 나는 / 얼마나 이기적인가 / (하략)' 이 시는 곧 초록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도 모르고 지금 힘들다고 절망하는 필자의 모습을 반추하고 있다. 그러나 그 초록도 언젠가는 반드시 땅에 떨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이기에 사실은 그 의미도 극히 제한적이다.

    나무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묵묵히 세상에 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왜 나무를 공격하지 못해서 안달인지 모르겠다. 은혜를 모르는 배신에 치를 떨지도 모를 나무는 내색조차 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또 몸이 베어져 죽어갈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죽어서도 세상에 토막 난 자신의 몸과 더욱 은은한 향기를 제공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깊은 사랑이 있을까. 그렇게 배신은 철저히 인간의 몫이고 전유물이다. 그렇게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우리는 나무를 통해 인지할 수 있다.

    '(상략) / 제 자리 가만히 서서 / 그늘 만들어 주던 나무에 / 선(善)으로 위장한 미소로 속 감추고 / 허세 부리던 광인(狂人)이 / 날선 도끼를 연신 찍어댔다 // 나무는 고통에 신음하며 / "맘껏 찍어라 / 그러면 나는 너의 광기에 관용을 보여 주마" // 광인은 찍어도 찍어도 쓰러지지 않자 / 제 풀에 지친 나머지 / 자신의 발등을 찍었다' 필자의 시 '나무 찍기'는 인간의 악한 본성에 일침을 가하는 시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또한 뜻대로 잘 되었다고 기뻐할 필요도 없다. 다 부질없는 일이다. 내일의 변화를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오늘은 실패했지만, 내일은 잘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막연한 예측일 뿐이다. 그저 다 비우고 덤덤하게 살아갈 뿐이다. 내일이면 날선 도끼와 전기톱에 허리가 잘리울지도 모르는 나무도 저토록 의연하지 않은가.

    불교에서의 무(無)와 유교에서 무위(無爲)는 변화와 해탈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잘려진 나무의 등걸에서 작은 푸른 잎새를 싹 틔우는 것처럼 모든 것은 다 잃고 텅 빈 것이 아니라 계속 비우고 채워지는 과정, 즉 순환의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고 통탄할 일이 아니고, 문제는 그 이룬 것들을 부족하다며 인정하려 들지 않고 남들이 맺은 결실을 빼앗지 못해 안달하는 세상 사람들의 탐욕에 있다.

    제는 인간의 열등의식으로 자신의 숨겨진 본성의 악한 모습이 '나(我)' '무(無)' 즉 '나는 없는 존재'라고 강변하는 나무에게 조차 치명적 위해를 가하는 것이었다고 자백하자. 상처받아 절망하고 분노가 치미는 시간과 어쩌다 찾아올 즐거움의 조각조각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나무처럼 끊임없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비우는 연습만 하자. '언젠가는'이라는 단서는 필요 없다. 그 따위 불필요한 희망 고문은 이제는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 글쓴날 : [25-12-24 19:15]
    • GPN 기자[2999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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